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쎄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 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 사람이 되었네



◇ 시구 연구

 

*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 암울한 현실 상황,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상황

*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 밝은 미래가 실현되기 어려울 만큼 현실 상황이 각박함

*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 암울한 현실을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 사랑할 수 없는 ~용서하기 위하여 : 삶의 부정적인 측면까지 포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 노래에 담긴 희망과 염원이 미래의 길을 열어


 

◇ 요점 정리


* 주제 :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희망을 잃지 않는 민중의 삶

 

* 구성

 1-2행 : 눈 내리는 밤 길을 잃은 맹인 부부 가수

 3-11행 : 사랑과 관용이 노래를 부르는 맹인 부부 가수

 12-16행 : 아름답고 즐거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17-21행 : 눈사람이 된 맹인 부부 가수



 감상과 이해


- 이 시는 가난하고 추운 삶의 한 가운데 있는 민중의 고통과 눈물이 희망과 기다림으로 아름답게 변주되는 모습을 그린 노래이다. 맹인 부부 가수는 거리의 군중들의 사랑을 구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눈은 이들의 머리 위로 자꾸 쌓여만 간다. 앞으로 갈 길은 멀고 그 길의 방향마저 찾기가 힘들어졌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따뜻함과 관용과 화해의 눈빛을 읽어 낸다. 함박눈에 덮인 맹인 가수는 어느새 희망의 상징인 눈사람이 되어 거리에 서 있다.


- 물론 맹인 부부가 기다리는 '눈사람'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이 세상의 '절망'을 구원하는 어떤 상황의 감각적 표상이다. 구약의 메시아니즘을 연상시킬 정도로 간절한 이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이 곧 기다림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통해 그 절실함과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이 기다림의 행위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소외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비극성과 갈등하고 대결하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행위의 모형으로서, 정치적 알레고리에 한정되지 않는 비상한 활력을 가지고 있다(물론 당대적 효과도 아울러 띤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당대는 물론 인간 보편의 존재 조건에 대한 해석이 모두 가능한 풍부한 동심원적 상징을 거느리고 있다).


- 시인은 이 작품에서 그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결국은 '화해'와 '용서', '사랑'임을 노래한다. 눈 오는 추운 밤에 앞 못 보는(그래서 내면 깊이까지 볼 수 있는) 맹인 부부 가수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눈발을 뚫고 길이 되어 앞질러가 결국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는데,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의 과정을 통해 정호승은 우리 시대의 슬픔과 그 슬픔이 기다림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궁극적 희망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 [파도타기], [눈사람], [출감] 등에서 줄곧 나타나는 이 같은 '눈사람' 이미지는 한결같이 저차원의 알레고리를 벗어나 정호승 개인 차원의 창조적 상징이 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의 형상으로, 혹은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인간의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눈사람])의 형상으로, 혹은 "눈사람으로 서 계시다가/눈사람 녹은 물로/ 감옥의 우물 속에 깊이 흘러가"신 어머니([출감])의 형상으로 연쇄적으로 나타나면서 희생자, 선구자 등의 이미지를 다성적으로 띤다. 특히 자신을 녹이며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의 이미지는, 인간의 존재 근거 자체가 자신을 소멸시킨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곧 '삶/죽음' '생성/소멸' '슬픔/희망'의 뿌리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정호승 [鄭浩承, 19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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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였다. 이후 시집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987) 등을 통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을 따뜻한 시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암울한 분단상황에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슬프고도 따뜻한 시어들로 그려내었다. 《샘터》 편집부와 《월간조선》에서 근무하였고, 2000년 현대문학북스 대표가 되었다.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2000),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0) 등이 있고, 수필집 《첫눈 오는 날 만나자》(1996)와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1996), 《연인》(1998), 《항아리》(1999), 《모닥불》(2000),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