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 작품 전문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 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 작가 소개
정진규(1939~ ) :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0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시"동인.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상임위원, "현대시학" 주간.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 "유한의 빗장",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매달려 있음의 세상",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연필로 쓰기", "뼈에 대하여",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 작품 해설
이 시는 유년의 꿈을 잃어버린 자아의 공허하고 외로운 존재인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3연의 산문시 형식으로 이 시를 구성하여 외로움에 젖은 자아의 모습을 더 잘 드러나게 하였다.
이 시에서 '들판의 비인 집'이란 바로 이처럼 공허하고도 외로운 존재의 집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어릴 때의 꿈 많던 시절과 비극적인 현재를 대비하여 고독한 존재의 비애를 부각시키고 있다.
먼저 1연에서는 현실 상황을, 2연에서는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며 방황하는 존재의 모습을, 그리고 3연에서는 그리운 대상인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공허한 마음을 더욱 고조시킨다.
시인이 잃어버린 따뜻한 유년 시절을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워하면서 비애에 젖는 것은 나날이 꿈을 상실하게 하고 삭막해져 가기만 하는 현실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시간적으로는 유년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지만,
그 시절에 경험했던 따뜻하고 정감 어린 모습들을 잊지 않는다면 현실의 비극적 상황을 그나마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인의 생각이 이 시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