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아무런 전제 없이 한 편씩을 읽을 수도 있고 한 시인의 작품만을 모아 읽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앞뒤의 문학사적 연관을 살핌으로써 더 잘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시를 어떤 연대기적 지식의 재료로만 생각하는 태도이다. 수많은 시인과 사조(思潮)의 이름을 머리 속에 빽빽하게 채워 넣어야 현대시의 흐름을 안 것이라는 믿음은 허망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중요한 시인이 활동했던 시기라든가 한 시대의 전반적인 경향 정도는 대강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한 간략해야 한다. 분명히 단언하건대,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나 시 비평가들 중 어느 누구도 고등학교 참고서에 나오는 숱한 동인지‧잡지들의 이름과 발행 연도, 시인들의 등장 시기, 모든 시집의 이름 그리고 그 밖의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다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훌륭하게 시를 연구‧해설하고 가르칠 수 있다. 사전이나 기타 참고 자료가 도와 줄 수 있는 사항을 낱낱이 기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게 정리된 현대시사의 대체적 흐름과 주요 경향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여기에 정리된 현대시사의 윤곽을 훑어 나가면서 단편적 지식보다는 전체의 줄기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권한다.
1. 현대시에로의 이행(移行)
한 시대가 지나가고 다음 시대가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내기까지의 사이에는 으레 과도기적 변화의 단계가 있는 법이다. 20세기 초기의 우리 시에도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으니 대략 1910년대가 이 무렵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전체를 종합하여 볼 때 다양한 모색과 변화의 움직임이 얽힌 시대이며, 조금 구체적으로 나누어 말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유형의 시적 조류가 공존, 갈등하였던 기간이다.
(1) 예전의 시가 문학의 계속 : 시조, 가사, 민요, 한시 등
(2) 예전의 시 형식을 빌려 새로운 시대의 사상과 경험을 노래한 작품들 : 개화기 가사, 의병가(義兵歌), 시대 비판적인 시조 등
(3) 새로운 노래와 시의 시도 : 창가, 신체시 등
이 중에서 (1)에 속하는 것들은 형태와 내용이 모두 앞 시대의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현대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역사적 의의는 없다. 우리가 눈여겨 볼 만한 것은 (2)와 (3)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1) 예전의 형식에 새로운 시대의 의식을
문학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 못지 않게 형식의 변화도 중요한 것이지만, 이 두 가지가 항상 나란히 발맞추어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특히 18세기 말에서 1900년대까지의 이른바 개화기는 심각한 역사적 격동기였으므로, 형식의 변화나 세련보다는 거기에 담기는 시대 정신이 더 급박하였다. 이러한 단계의 시는 대개 일단 전통적 형식을 그대로 빌리거나 약간 변형하여 이용하면서 새로운 이념, 경험을 담게 된다. 말하자면 옛 부대에 새 술을 담는 격이다. 그런 부류로서 나타난 것들을 손꼽아 보면 독립 신문의 애국가류, 대한 매일 신보의 우국가류, 의병 가사, 우국 시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독립신문(1896년 창간)의 애국가류이다. 독립신문의 애국가류들은 독자들이 보낸 작품들로서 대개 자주 독립을 찬양하고 나라를 위한 사랑과 새로운 문명의 희망을 노래했다. 형식을 보면 전통적인 가사의 네 마디 가락을 따랐으나 그 길이는 노래할 수 있도록 짧아졌고, 어떤 작품에는 후렴이 있기도 하다.
1905년에 창간되어 우리의 국권이 상실되는 1910년까지 치열한 비판 정신과 항일 의식을 발휘한 대한매일신보에는 우국가 또는 우국경시가(憂國警時歌, 나라를 근심하고 시대를 경계하는 노래)라고 불리는 독특한 가사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독립신문의 애국가들이 대체로 희망적인 분위기를 가졌던 데 비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가사들은 나라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 가던 당시의 실정으로 인하여 매우 침통하고 심각한 색채를 띠었다. 그 속에는 무능, 부패한 조정의 관리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침략자 일본에의 굳센 저항 정신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절실한 시대 문제를 담기 위하여 그 길이는 독립신문의 애국가들보다는 훨씬 길어졌고, 연을 나누어 풍자적 후렴구를 넣는 등 새로운 시도를 보였다.
이 밖에 대한매일신보 등에는 옛시조의 형식을 빌려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들을 더 많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05년의 을사 강제 조약을 고비로 하여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 운동의 과정에서는 의병들의 신념과 투쟁 경험을 담은 의병 가사가 생겨났다. 그 형식은 예전의 가사와 같았으나 내용은 전혀 새로왔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오라 오라 돌아오라 창의소(倡義所)로 돌아오라
만일 만일 오지 않고 왜적에 종사하여
불행히도 죽게 되면 황천에 돌아가서
무슨 면목 가지고서 선황(先皇) 선조 뵈올소냐
2) 창가와 신체시
이러한 작품들이 나올 무렵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와 시 형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창가는 원래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불리던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문학상으로는 그 가사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창가는 대개 7‧5조 등의 새로운 가락에 맞추어 지어진 노래 형태의 작품들은 모두 창가라 하게 되었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로 시작되는 권학가(일명 학도가)도 그 중의 하나이며, 최남선이 지은 장편 창가로는 ‘경부 철도 노래’와 ‘세계 일주가’가 유명하다.
그러나, 창가도 전통적인 가락과 조금 다르다 뿐이지 정형적인 리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자유시라고 할 만한 형태의 작품은 최남선이 ꡔ소년ꡕ 창간호(1908)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로 처음 등장했다. ‘신체시’라는 이름부터가 종래의 것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를 짓겠다는 그의 의식을 말해 준다. 그 첫 연은 다음과 같다.
처 ꠏꠏꠏꠏꠏꠏꠏㄹ썩, 처 ꠏꠏꠏꠏꠏꠏꠏㄹ썩, 척, 쏴 ꠏꠏꠏꠏꠏꠏꠏꠏꠏ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위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 ꠏꠏꠏꠏꠏꠏꠏㄹ썩, 처 ꠏꠏꠏꠏꠏꠏꠏㄹ썩, 척, 튜르룽, 콱
넓은 세계를 향한 소년의 정열을 북돋우고자 한 이 작품에는 아직 관념적이고 서투른 맛이 있어서 현대시의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최남선, 이광수 등이 여러 편의 신체시를 발표하는 동안 현대시에로의 성숙이 차차 준비되어 갔다.
※ 출처 : 김흥규, <한국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한샘, 1994.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