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똥침국어교실(http://hongkgb.x-y.net), 
              이문수의 국어 사랑(
http://munsu.pooding.com/)
              네이버 백과 사전(http://100.naver.com/)  



 

                                             양귀자, <한계령>


줄거리


  소설가인 나에게 어릴 적 친구인 은자로부터 전화가 온다. 밤무대 가수가 된 그녀는 나에게 한번 찾아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은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은 변해버린 고향의 아름다운 과거를 그녀를 통해서만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큰오빠의 삶의 무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지만, 과거에 나를 비롯한 여섯 동생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그 큰오빠가 삶의 허망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는 은자가 일하는 새 부천 나이트클럽에서 한계령이라는 노래를 듣고는 큰오빠의 삶을 절실히 이해하고 연민을 느낀다



핵심정리


- 갈래 : 단편소설, 연작소설

- 시점 : 1인칭 주인공시점

- 배경 : 시간-1960년대, 공간-서울, 부천

- 주제 :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시민의 삶의 일상과 소박한 꿈.

- 성격 : 회고적, 성찰적, 상징적

- 문체 : 여성적 어조가 드러나는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

- 구성 : 회고적 구성, 액자식 구성

- 주제 : 삶의 무게와 그 허망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에 대한 연민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시민의 삶의 일상과 소박한 꿈.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꿈과 좌절



표현상 특징


- 현실과 회상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음

- 두 인물(은자와 큰오빠)의 삶을 겹쳐서 제시하고 있음

- 대중 가요를 소재로 하여 주제를 암시하고 있음



등장인물


- 나 : 소설가이자 서술자. 큰오빠의 도움으로 성공한 성인이 된 지금 큰오빠가 겪는 정신적 공허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 큰오빠 : 여섯 동생을 키우느라 세월을 다 보내고 이제는 그 과거에 사로잡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 은자 :  나의 친구이자 밤무대 가수. 점점 고향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음에도 나에게는 고향의 아름다운 과거를 떠올릴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해와 감상


  <한계령>은 70년대 도시 인구로 유입된 시골 사람들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떤 형태로 유랑하고 있는가를 다룬 작품으로서, 고도화된 현실에 대해 부정적 가치관을 지닌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삶에 적응해 나가는 것을 통해서 지난 기억의 아름다움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양귀자 특유의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로 독자에게 신선감을 주는 이 작품은 물질 만능화된 현대 사회에서 주변 인물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따뜻한 눈으로 유머러스하게 그려 내었다.



갈등분석


  1960~70년대 근대화 시기를 배경으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험난한 과거와 무기력한 현재를 보여주면서 그들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필요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인물과 인물의 직접적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생의 허무에 사로잡힌 큰오빠를 바라보며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의 심리적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관련 노래 - 양희은, <한계령> ※ 첨부파일 참고
 

작사, 작곡 : 하덕규 

저 산은 내게
오지마라 오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귀자 [梁貴子, 1955.7.17~]


양귀자.jpg

요약
소설가. 삶을 형상화하는 작가적 기질이 뛰어나며 박진감 있는 문체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였다. 작품 《원미동 사람들》로 평론가들로부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의식 있는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전북 전주
주요수상 이상문학상(숨은꽃, 1992), 유주현문학상(1989), 현대문학상(곰이야기, 1992)
주요작품 《원미동 사람들》(1987),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모순》(1998)
본문

1955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가 죽자 큰 오빠와 어머니가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어린시절 만화를 즐겨 보았으며 이광수의 《유정》을 읽고 문학적 충격을 받았다. 전주여고에 다니면서 백일장과 문예 현상공모에 참가하였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습작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쉬었으며 원광대학교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소설이 뽑혀 문예장학생으로 국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시절 학보사에서 활동하였으며 숙명여자대학교 주최 범대학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 작품이 《문학사상》에 특별 게재되었다. J.라브뤼예르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읽고 문학과 작가의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졸업 후 2년 동안 중고등학교와 잡지사에 근무하였다.

1978년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 등단했다. 1986~1987년까지 씌어진 단편을 모은 대표작 《원미동 사람들》(1987)은 경기도 부천의 한 동네에 사는 서민들의 애환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평론가들로부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의식 있는 소설가로 주목받았다. 또 박태원의 《천변풍경》 이후 훌륭한 세태소설로서 1980년대 단편문학의 정수라는 평가도 받았다.

1990년 첫 장편소설 《잘가라 밤이여》를 펴냈으나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없자 1년 뒤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했다.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분단 현실의 온갖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쳤는데,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독자들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 무렵 원인불명의 열로 입원하였는데 여기서 《천년의 사랑》을 구상하였다.

1990년대에는 주로 대중소설에 치중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은 현대판 아마조네스라는 비판과 함께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영화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천년의 사랑》은 시공을 넘나드는 신비주의적 사랑이야기로 200만 부가 팔렸다. 《모순》(1998)은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문체, 약간은 통속적인 주제 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1980년대에는 전망 없는 소시민의 문학으로, 1990년대에는 통속문학으로 폄하하는 시선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은 능란한 구성과 섬세한 세부묘사,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삶을 형상화하는 작가적 기질이 뛰어나며 박진감 있는 문체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였다. 그녀는 ‘소설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밖의 작품으로 《바빌론 강가에서》(1985), 《귀머거리 새》(1985), 《길 모퉁이에서 만난 사람》(1993),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1993), 《슬픔도 힘이 된다》(1993), 《곰 이야기》(1996), 《삶의 묘약》(1996) 등이 있다.


양귀자의 작품세계


 양귀자 소설을 읽는 일은 참 즐겁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아무 부담 없이 글의 행간에 따라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기분좋은 미소를 짓게 되고, 그렇게 소설을 읽다 보면 마음 속에 딱딱하게 응고되어 있던 덩어리가 어느새 감동으로 물렁거리기 때문이다.


 양귀자를 만나는 일은 더 즐겁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여 잘 들어줄 줄 알고, 들은 이야기에 그만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탄력성있는 공처럼 다시 되돌려주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미리 그어놓은 선이나 눈금으로 상대를 재는 자[尺]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귀자 소설을 읽는 일과 양귀자를 만나는 일이 같은 행동의 다른 방법처럼 느껴진다. 흔히들 글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로 양귀자 같은 작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절멸되거나 변질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고 있는 양귀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운이 좋은’ 작가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양귀자 소설이 많이 팔리고, 그러면서도 문학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더더구나 작가 자신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양귀자는 다른 관점으로 말한다.


 "글쎄요, 소설이든 제 속마음이든 많이 읽힌다는 뜻이네요. 비평가나 독자나 다 원하는 만큼만 읽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무엇을 갖고 있든 읽는 사람들이 많이 원하기 때문일 거예요.”


 양귀자 소설이 많이 팔린, 즉 많이 읽힌 예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소설을 열심히 찾아 읽는 독자가 아니더라도, 지난해에 발간된 『천년의 사랑』이나 92년에 나온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소문을 통해 많이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 읽힌 책들은 그것만이 아니다. 87년에 출간된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과 89년의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90년의 『희망』 등 일부 창작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이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바 있다.


 한편 그는 『원미동 사람들』로 88년에 유주현문학상을 수상하고, 2년에는 「숨은 꽃」으로 이상문학상을 받고, 그리고 올해에는 단편  곰 이야기」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시상되는  요한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러나 그동안 우수한 중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적지 않은  학상을 도둑맞았다는 말도 함께 듣고 있다.


 그리고 또 양귀자는 설문조사 때마다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조사 대상이 여성독자들일 때는  아하는 순위가 1위로 선정될 때가 많다. 평소에 사람을 만날  회가 거의 없는 그를 이렇듯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책이 많이 읽히는 작가라고 해서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양귀자가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책을 읽는 동안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읽는 행위는 일방적이지만 책 속에 깊이 몰입하다 보면 마치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얻는 작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아니 사실을 말하면, 이 가운데서 한 가지를 얻는 작가도 드물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얻고 있는 양귀자가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양귀자가 ‘운이 좋은’ 작가로 일컬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여기서 ‘운이 좋은’을 강조한 이유는 양귀자가 얻고 있는 것이 ‘운이 좋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먼저 작가 양귀자가 걸어온 문학적 발자취를 되밟아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그가 글쓰는 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이미 전주여고 재학 때부터이다. 그 당시에 양귀자는 원광대학교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소설을 투고해서 뽑히고, 문예장학생으로 국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 재학중에는 숙명여대에서 주최하는 범대학문학상에 당선한다. 그때 수상작은 「두 개의 신」이라는 제목의 단편이었는데, 기성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소설이라는 평과 함께 <문학사상>에 특별게재되기도 한다.


  그후 그는 78년에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그때부터 양귀자의 주옥 같은 중단편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 문단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 「녹」「원미동 시인」「한계령」「기회주의자」 등 적지 않은 작품이 문학상을 도둑맞았다는 말이 나올 만한 역작들이다. 이 소설들은 두 권의 창작집 『귀머거리 새』(85년), 『슬픔도 힘이 된다』(93년)에 수록되어 작품집이 발간될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렇듯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온 양귀자의 이력을 밝히는 것은, 그가 소설을 통해서 우리 삶을 탐색해 온 기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그의 많은 소설들이 뛰어난 작품이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삶을 형상화하는 그의 작가적 역량이 빼어나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감싸안으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기운이 있다. 대학 재학 때 써서 관심을 모았던 「두 개의 신」에서부터 가장 최근에 발표한 「금지된 말」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그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그 기운은 ‘따뜻한 사랑’이다. 그의 작품 어느 것을 펼쳐보아도 우리는 양귀자가 담아내고 있는,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그 사랑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결국 양귀자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를 다 얻고 있는 것은, ‘운이 좋은’ 작가여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써오면서 그 안에 담아내고 있는 ‘따뜻한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귀자 소설에서 줄곧 만날 수 있는 그 ‘따뜻한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천년의 사랑』의 첫머리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 그 해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은 영안실이 보이는 병실에서 구상되었고 첫 문장이 쓰여졌다. 영안실 앞의 그 많은 사람들과 또 영안실 안의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던 내 머리 속으로 저절로 한 소설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그때 이미 나는 좀더 다른 곳에서 소설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므로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하는 이 소설을 다시 고쳐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양귀자는 ‘바라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품을 다시 고쳐 쓰기까지 5년이란 시간을 보낸 것도 그냥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바라보았다’는 표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쓰여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애정이 담긴 깊은 눈으로 아주 자세히 잘 바라본 다음에야 쓰여질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무엇을 도모하기 위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이 쓰여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얼핏보았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어느새 마음의 눈으로, 그리고 영혼의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여성문제도 단순한 현상에 대한 질타를 넘어 인간애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이고, 우리의 사랑이 천년이라는 시공을 뛰어넘어 애절하게 떨리는 것이 보이고, 지나온 삶에 비추어 현재의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가 보인다. 그렇게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어난 느낌이 ‘따뜻한 사랑’의 형태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요즘도 그는 바라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근황을 묻자 양귀자는 그의 작업실에서 내다보이는 북한산에 눈을 준 채 대답한다.


 “특별한 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이 일하러 가듯이 저도 이 작업실에 나오고, 그리고 일을 해요. 날마다 원고를 써대는 것은 아니지만, 원고가 쓰여지기 이전의 작업들을 한다고 할까요. 머리 속으로 새로 쓰여질 소설을 굴리고 있다고 보면 되죠.”


 여기서의 ‘굴리고 있다’도 ‘바라보고 있다’의 다른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양귀자는 앞으로 쓰여질 소설의 내용이 될 만한 것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발간된 후 숱하게 많이 거론된 여성문제의 논의가 있었고, 『천년의 사랑』이 나온 후에 그 내용을 흉내낸 아류들이 많이 쏟아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전생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증폭되지 않았던가. 그런 현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양귀자는 한 작가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과 그 책임까지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그의 작품세계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도 양귀자가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올해 현대문학상을 받으면서 시상식장에서 밝힌 수상소감을 통해 그 부분이 느껴진다.


 '90년대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학의 자리는 낡은 논의로만 소설을 재단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문학이 제1세기의 문학론에만 너무 기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의미없는 힘의 소모만 거듭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문학의 고유한 소설의 자리를 잃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세계문학의 외곽만 떠도는 건 아닌지, 저 또한 그것에 부역하는 것은 아닌지 자주 고민해 왔습니다.’


 그런 고민의 껍질을 벗고 더 멀리 바라보는 과정에서 쓰여진 작품들을 놓고, 그의 작품세계가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건 가지의 끝만 본 사람의 성급한 속단이다. 나뭇가지가 아무리 하늘 높이 치솟는다 해도 땅 속에 묻힌 뿌리를 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소설에서 만났던 좋은 느낌들을 다치지 않게 잘 골라내서 모아놓은 것 같은 작가 양귀자. 그는 오늘도 우리의 삶을 오래 바라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을 일궈내고 있다. 그런 그의 작품세계를 오래 바라본다면, 그는 우리를 더 넓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데려갈 것이다.


글/권태현(소설가/시인)



 소설읽기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탁하고 갈라져 있었다. 얼핏 듣기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곧 기억의 갈피를 젖히고 음성의 주인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게 전화를 건 적이 있는 그런 굵은 목소리의 여자는 두 사람쯤이었다. 한 명은 사보 편집자였고 또 한 명은 출판인이었다. 두 사람 다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활동적이고 거침이 없는 여걸이 아니겠냐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두 사람 중의 하나라면 사보 편집자이기가 십상이라고 속단한 채 나는 전화 저편의 여자가 순서대로 예의를 지켜가며 나를 찾는 것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무언가를 끓이고 있던 중이어서 내 마음은 급하기 짝이 없었다. 급한 내 마음과는 달리 여자는 쉰 목소리로 또 한번 나를 확인하고 나더니 잠깐 침묵을 지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대단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혹시 전주에서..... 철길 옆동네에서 살지 않았나요?"



 수필이거나 꽁트거나 뭐 그런 종류의 청탁 전화려니 여기고 있던 내게는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맞는 말이기는 하였다. 나는 전주 사람이었고 전주에서도 철길 동네 사람이었다. 주택가를 관통하며 지나가던 어린 시절의 그 철길은 몇 년 전에 시 외곽으로 옮겨지긴 하였지만 지금도 철로연변의 풍경이 내 마음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도 전화 속의 목소리는 또 한번 뜸을 들였다.



 "혹시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난 박은자라고, 찐빵집 하던 철길 옆의 그 은자인데....."



 잊었더라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십 년도 훨씬 전의 어린 시절 동무 이름까지야 어찌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는 듯이 목소리는 한층 더 자신이 없었다.



 박은자.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큼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전화 속의 목소리가 찐빵집 어쩌고 했을 때 이미 나는 잡채가닥과 돼지비계가 뒤섞여 있는 만두속 냄새까지 맡아버린 뒤였다. 하지만 나는 만두 냄새가 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그간 내게 가르쳐준 대로 한껏 반가움을 숨기고, 될 수 있으면 통통 튀지 않는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알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반기는 내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날아가서 그녀의 마음에 꽂힌 모양이었다. 쉰 목소리의 높이가 몇 계단 뛰어오르고, 그러자니 자연 갈라지는 목소리의 가닥가닥마다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오면서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반갑다. 정말 얼마 만이냐? 난 네가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거든. 전화할까말까 꽤나 망설였는데.... 그런데 자꾸 여기저기에 네 이름이 나잖아? 사람들한테 신문을 보여주면서 야가 내 친구라고 자랑도 많이 했단다. 너 옛날에 만화책 좋아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신문사에 전화했더니 네 연락처 알려주더라. 벌써 한 달 전에 네 전화번호 알았는데 이제서야 하는 거야. 세상에, 정말 몇 년 만이니?"



 정확히 이십 오 년 만에 나는 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철길 옆 찐빵집 딸을 친구로 사귀었던 때가 국민학교 2학년이었으므로 꼭 그렇게 되었다. 여기저기 이름 석자를 내걸고 글을 쓰다보면 과거 속에 묻혀 있던, 그냥 잊은 채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을 이름들이 전화 속에서 튀어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물론 반갑기야 하고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서로 살아가는 행로가 다르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겉으로는 한번 만나자거나 자주 연락을 취하자거나 하는 식의 말치레만으로 끝나는 일회성의 재회였다.



 그렇지만 찐빵집 딸 박은자의 전화를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그애가 설령 어느 지면에서 내 이름과 얼굴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나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전혀 자신 없어 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만에 하나 기억을 해냈다 하더라도 신문사에 전화를 해서 내 연락처를 수소문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우리들은 그저 60년대의 어느 한 해 동안 한 동네에 살았을 뿐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그 한 해가 커다란 위안이었지만 그 애에게는 지겨운 나날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 뜻밖의 전화는 이십 오 년이란 긴 세월을 풀어놓느라고 길게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그 애에게 왜 가수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참이었다.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너만큼 잘 부르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디어디에서 너의 짧은 글을 읽었다는 것과 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을 믿지 않던 주위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네 이름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 어떠했는가를 그 애는 몇 번씩이나 되풀이 말하였다. 그런 이야기 끝에 은자가 먼저 자신의 직업을 밝혔다.



 "난 어쩔 수 없이 여태도 노래로 먹고산단다. 아니, 그런데 넌 부천에 살면서 '미나 박'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니? 네 신랑이 샌님이구나. 너를 한번도 나이트클럽이나 스탠드바에 데려가지 않은 모양이네. 이래봬도 경인지역 밤업소에서는 미나박 인기가 굉장하다구. 부천 업소들에서 노래부른 지도 벌써 몇 년째란다. 내 목소리 좀 들어봐. 완전 갔어. 얼마나 불러제끼는지. 어쩔 때는 말도 안 나온단다. 솔로도 하고 합창도 하고 하여간 징그럽게 불러댔다."



 그제서야 난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쉰 목소리의 다른 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수들의 말하는 음성이 으레 그보다 훨씬 탁했었다. 목소리가 그 지경이 될 만큼 노래를 불렀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노래를 빼놓고 무엇으로 은자를 추억할 것인지 나는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노래와는 전혀 무관 한 채 보통의 주부가 되어 있다가 내게 전화를 했더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비록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는 인기 가수가 아니더라도, 밤업소를 전전하는 무명 가수로 살아왔더라도 그 애가 노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슬쩍 검은 상처의 블루스나 버드나무 밑의 작은 음악회, 그리고 비오는 날 좁은 망대 안에서 들려주었던 가수들의 세계 따위, 몇 가지 옛 추억을 그 애에게 일깨워주었다. 짐작대로 은자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렇게 세세한 일까지 잊지 않고 있는 나의 끈질긴 우정을 그녀는 거의 까무라칠 듯한 호들갑으로 보답하면서 마침내는 완벽하게 옛 친구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은자의 지금 모습이 어떤지 나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설령 클럽으로 찾아간다 하여도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은자는 상고머리에, 때 낀 목덜미를 물들인 박씨의 억센 손자국, 그리고 터진 겨드랑이 사이로 내보이던 낡은 내복의 계집아이로 붙박여 있었다. 서른도 훨씬 넘은 중년 여인의 그 애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 수십 년간 가슴에 품어온 고향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만나버린 뒤에는 내게 위안을 주었던 유년의 소설도, 소설 속의 한 시대도 스러지고야 말리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현실로 나타난 은자를 외면할 수 있을는지 그것만큼은 풀 수 없는 숙제로 남겨둔 채 토요일 밤을 나는 원미동 내 집에서 보내고 말았다.



 일요일 낮 동안 나는 전화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제 은자는 가시 돋친 음성으로 나의 무심함을 탓할 것이었다. 그녀의 질책을 나는 고스란히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나는 그 애가 던져올 말들을 하나하나 상상해보면서 전화를 기다렸다. 오전에는 그러나 한번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 일요일은 언제나 그랬다. 약속을 못 지킨 원고가 있더라도 일요일에까지 전화를 걸어 독촉해올 편집자는 없었다. 전화벨이 울린다면 그것은 분명 은자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오후가 되어서 이윽고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수화기에선 쉰 목소리 대신에 귀에 익은 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살붙이의 음성은 모든 불길한 예감을 젖히고 우선 반가웠다. 여동생이 전하는 소식은 역시 큰오빠에 관한 우울할 삽화들뿐이었다. 마침내 집을 팔기로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과, 한 달 남은 아버지 추도 예배는 마지막으로 그 집에서 올리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어제였는데 큰오빠는 종일토록 홀로 술을 마셨다고 했다. 집을 팔기 원했으나 지금은 큰오빠의 마음이 정처없을 때라서 식구들 모두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동생은 말하였다.



 집을 팔았다고는 하지만 훨씬 좋은 집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이 큰오빠에게 있으므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큰오빠는 어제 종일토록 홀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나도, 그리고 동생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번 추도 예배는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 되겠어. 내가 오빠들한테도 모두 전화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큰오빠 요새 너무 약해졌어. 여관숲이 되지만 않았어도 그 집 안 팔았을 텐데. 독한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오늘 아침엔 일어나지도 못했대. 좋은 술 다 놓아두고 왜 하필 소주야? 정말 모르겠어. 전화나 한번 해봐. 그리고 추도식 때 꼭 내려와야 해. 너무들 무심하게 사는 것 같아. 일년 가야 한 번이나 만날까, 큰오빠도 그게 섭섭한 모양이야......"



 그 집에서 동생들을 거두었고 또한 자식들을 길러냈던 큰오빠였다.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 거기에 스며 있었다. 큰오빠는, 신화를 창조하며 여섯 동생을 가르쳤던 큰오빠는 이미 한 시대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십 오 년 전에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던 그가 벌써 쉰 살의 나이로 늙어가고 있었다. 이십 오 년을 지내오면서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은 땅 위에서 사라졌다. 목숨을 버린 일로 큰오빠를 배신했던 셋째 말고는 모두들 큰오빠의 신화를 가꾸며 살고 있었다. 여태도 큰형을 어려워하는 둘째 오빠는 큰오빠의 사업을 돕는 오른팔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화훼에 일가견을 이루고 있었다. 내과전문의로 개업하고 있는 넷째 오빠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고급 공무원이 된 공부벌레 다섯째 오빠도 큰오빠의 신화를 저버리지 않았다. 고향의 어머니와 큰오빠가 보기에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지어낼 뿐인, 책만 끼고 살더니 가끔 글줄이나 짓는가보다는 나 또한 궤도 이탈자는 결코 아닌 셈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던 해에 고작 한 살이었던 내 여동생은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음악 선생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정작 큰오빠 스스로가 자신이 그려놓은 신화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공장에서 돈을 찍어내서라도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시절에는 우리들이 그의 목표였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실패할 수 없도록 이를 악물게 했던 힘은 그가 거느린 대가족의 생계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생들이 모두 자립을 하였다. 돈도 벌을 만큼 벌었다. 한때 그가 그렇게 했듯이 동생들 또한 젊고 탱탱한 활력으로 사회 속에서 뛰어가고 있었다. 저들이 두발로 달릴 수 있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인가, 라고는 묻고 싶지 않지만 노쇠해가는 삶의 깊은 구멍은 큰오빠를 무너지게 하였다. 몇 년 전의 대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후부터는 눈에 띄게 큰오빠의 삶이 흔들거렸었다. 이것도 해선 안 되고 저것도 위험하며 이러저러한 일은 금하여라, 는 생명의 금칙이 큰오빠를 옥죄었다. 열심히 뛰어 도달해보니 기다리는 것은 허망함뿐이더라는 그의 잦은 한탄을 전해들을 때마다 나는 큰오빠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수없이 유년의 기록을 들추면서 위안을 받듯이 그 또한 끊임없이 과거의 페이지를 넘기며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이 시대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지도.



 머지않아 여관으로 변해버릴 집을 둘러보며, 집과 함께 해온 자신의 삶을 안주 삼아 쓴술을 들이키는 큰오빠의 텅 빈 가슴을 생각하면 무력한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 아버지 산소에 불쑥불쑥 찾아가서 죽은 자와 함께 한 병의 술을 비우는 큰오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 인간의 뼈저린 고독은 살아 있는 자들 중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 것, 오직 땅에 묻힌 자만이 받아 줄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였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결심을 전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머니가 큰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엄마, 금식 기도 시작했어. 큰오빠가 교회에 나갈 때까지 아침 금식하고 기도 하신대.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노인네 고집이니 어련하겠수."



 교회만 다니게 된다면, 그리하여 주님을 맞아들이기만 한다면 당신이 견뎌온 것처럼 큰오빠 또한 허망한 세상에 상처받지 않으리라 믿는 어머니였다. 어쨌거나 간에 나로서는 어머니의 금식기도가 가까운 시일 안에 끝나지길 비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난 다음 나는 달력을 넘겨서 추도식 날짜에 붉은 동그라미를 두 개 둘러놓았다.



  오후가 겨웁도록 은자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지난밤에도 나타나지 않은 옛 친구를 더 이상은 알은 체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밤의 마지막 기회까지 놓쳐버리면 영영 그 애의 노래를 듣지 못하리라는 생각도 나를 초조롭게 하였다. 그 애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것에 답하는 마음으로라도 노래만 듣고 돌아올 수는 없을까 궁리를 하기도 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더라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가만히 있어도 연초록 물이 들 것 같더라고, 남편은 원미산을 다녀와서 한껏 봄소식을 전하는 중이었다. 원미동 어디에서나 쳐다볼 수 있는 길다란 능선들 모두가 원미산이었다. 창으로 내다보아도 얼룩진 붉은 꽃무더기가 금방 눈에 띄었다. 진달래꽃을 보기 위해서는 꼭 산에까지 가야만 된다는 법은 없었다. 나는 딸애 몫으로 사준 망원경을 꺼내어 초점을 맞추었다. 원미산은 금방 저만큼 앞으로 걸어와 있었다. 진달래는 망원경의 렌즈 속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새순들이 돋아난 산자락은 푸른 융단처럼 부드러웠다. 그 다음에 그가 길어온 약수를 한 컵 마시면 윈미산에 들어갔다 나온 자나 집에서 망원경으로 원미산을 살핀 자나 다를 게 없었다. 망원경으로 원미산을 보듯, 먼 곳에서 은자의 노래만 듣고 돌아온다면......



 마침내 나는 일요일 밤에 펼쳐질 미나 박의 마지막 무대를 놓치지 않겠다고 작정하였다.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다시 듣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미나 박의 레퍼터리가 어떤 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미루어 추측하건대 그런 무대에서는 흘러간 가요가 아니겠느냐는 게 짐작의 전부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귀가 괴로울 까닭은 없었다. 나는 이미 그런 노래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얼마 전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트로트 가요의 메들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부천역에서 원미동까지 오는 동안만 듣고 말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택시기사에게 노래 테이프의 제목까지 물어두었다. 아직까지 그 테이프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옛 가요들일 어째서 술좌석마다 빠지지 않고 앙코르되는지 이제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새부천 나이트클럽은 의외로 이층에 있었다. 막연히 지하의 음습한 어둠을 상상하고 있었던 나는 입구의 화려하고 밝은 조명이 낯설고 계면쩍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밴드 소리,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내는 소음들 때문에 나는 불현듯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아까 집 앞에서 지물포 주씨에게 좋은 데 간다고 대답했던 게 우스웠다. 가게밖에 진열해놓은 벽지들을 안으로 들이던 주씨가 늦은 시각의 외출이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었다. "어데 가십니꺼?"봄철 장사가 꽤 재미있는 모양, 요샌 얼굴 보기 힘든 주씨였다. 한겨울만 빼고는 언제나 무릎까지 닿는 반바지 차림인 주씨의 이마에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죽문을 밀치고 나오는 취객들의 이마에도 땀이 번뜩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취객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를 세고 있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가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대했던 대로 홀 안은 한껏 어두웠다. 살그머니 들어온 탓인지 취흥이 도도한 홀 안의 사람들 가운데 나를 주목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서서 나는 무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제 막 여가수 한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중이었다. 은자의 순서는 끝난 것인지, 지금 등장한 여가수가 바로 은자인지 나로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대까지는 꽤 먼 거리였고 색색의 조명은 여가수의 윤곽을 어지럽게 만들어놓기만 하였다. 짙은 화장과 늘어뜨린 머리는 여가수의 나이조차 어림할 수 없게 하였다. 이십 오 년 전의 은자 얼굴이 어땠는가를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내 머릿속은 캄캄하기만 하였다. 노래를 들으면 혹시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긴장 속에서 여가수의 입을 지켜보았다. 서서히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악단의 반주는 암울하였으며 느리고 장중하였다. 이제까지의 들떠 있던 무대 분위기는 일시에 사라지고 오직 무거운 빛깔의 음악만이 좌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탁 트인 음성의 노래가 여가수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가수의 깊고 그윽한 노랫소리가 홀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면서 대신 악단의 반주는 점차 희미해져갔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무언지 모를 아득한 느낌이 내 등허리를 훑어내리고, 팔뚝으로 번개처럼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오싹 몸을 떨면서 또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가수는 호흡을 한껏 조절하면서, 눈을 감은 채 노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가수의 목소리는 그윽하고도 깊었다.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저 노래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분명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랬음에도 전혀 처음 듣는 것처럼 나는 노래에 빠져 있었다. 아니, 노래가 나를 몰아대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노래는 급류처럼 거세게 흘러 들이닥쳤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여가수의 목에 힘줄이 도드라지고 반주 또한 한껏 거세어졌다. 나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 한순간 노래 속에서 큰오빠의 쓸쓸한 등이, 그의 지친 뒷모습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까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래의 제목은 '한계령'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었던 한계령과 지금 듣고 있는 한계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나는 정말 놀라운 노래를 듣고 있는 셈이었다.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저 여가수가 은자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노래를 들었고 여가수는 한순간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발 밑으로, 땅 밑으로, 저 깊은 지하의 어딘가로 불꽃을 튕기는 전류가 자꾸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질퍽하게 취하여 흔들거리고 있는 테이블의 취객들을 나는 눈물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그들에게도 잊어버려야 할 시간들이, 한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었다. 어디 큰오빠뿐이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그때, 나비넥타이의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로 안내해드릴까요?"



 웨이터의 말대로 나는 내가 앉아야 할 테이블이 어딘가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막막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는, 내가 돌아본 그 뒤는 조명이 닿지 않는 컴컴한 공간일 뿐이었다. 아마도 거기에는 습기차고 얼룩진 벽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웨이터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더듬거리고 있는 내 앞으로 한계령의 마지막 가사가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나는 내가 만난 그 여가수가 은자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많이도 넘어져가며 그 애는 미나 박이 되었지 않은가. 울며울며 산등성이를 타오르는 그 애, 잊어버리라고 달래는 봉우리, 지친 어깨를 떨구고 발아래 첩첩산중을 내려다보는 그 막막함을 노래부른 자가 은자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노래를 만났다. 노래를 만나는 꿈을 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밤에 나는 처음 알았다. 노래 속에서 또한 나는 어두운 잿빛 하늘 아래의 황량한 산을 오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지쳐 있었고 제각기 무거운 짐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짐꾸러미의 무게에 짓눌려 등은 휘어졌는데, 고개마루는 가파르고 헤쳐야 할 잡목은 억세기만 하였다. 목을 축일 샘도 없고 다리를 쉴 수 있는 풀밭도 보이지 않는 거친 숲에서 그들은 오직 무거운 발자국만 앞으로 앞으로 옮길 뿐이었다.



 그들 속에 나의 형제도 있었다. 큰오빠는 앞장을 섰고 오빠들은 뒤를 따랐다. 산봉우리를 향하여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두고 온 길은 잡초에 뒤섞여 자취도 없이 스러져버리곤 하였다. 그들을 기다려주는 것은 잊어버리라는 산울림, 혹은 내려가라고 지친 어깨를 떠미는 한줄기 바람일 것이었다. 또 있다면 그것은 잿빛 하늘과 황토의 한 뼘 땅이 전부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등을 구부리고 짐꾸러미를 멘 인간들은, 큰오빠까지도 한사코 봉우리를 향하여 무거운 발길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은자는 늦은 아침, 다시 쉰 목소리로 내게 나타났다.



  "전라도말로 해서 너 참 싸가지 없더라. 진짜 안 와버리대?"



 고향의 표지판답게 그녀는 별수 없이 전라도말로 나의 무심함을 질타하였다. 일요일 밤에 새부천클럽으로 찾아갔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물론 한계령을 부른 가수가 바로 너 아니었느냐는 물음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바쁜 몸만 아니면 당장 쫓아가서 한바탕 퍼부어주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어쨌든 앞으로 서울 나올 일 있으면 우리 카페로 와. 신사동 로타리 바로 앞이니까 찾기도 쉬워. 일주일 후에 오픈할 거야. 이름도 정했어. 작가 선생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다. '좋은 나라'라고 지었는데, 네가 못마땅해도 할 수 없어. 벌써 간판까지 달았는걸 뭐."



 좋은 나라로 찾아와. 잊지 마라. 좋은 나라. 은자는 거듭 다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카페 이름을 '좋은 나라'로 지은 것에 대해 나는 조금도 못마땅하지 않았다.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다만 내가 그 좋은 나라를 찾아갈 수 있을는지, 아니 좋은 나라 속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될는지 그것이 불확실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