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소문의 벽(壁)>


줄거리


  잡지사 편집장인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누구에게인가 쫓기고 있다며 도와 달라는 한 사내를 만난다. 엉겁결에 그를 하숙방으로 데려와 함께 잠이 들었던 '나'는 아침에 깨어나서 사내가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정신 병원을 찾아갔다가 그 사내가 병원에서 도망친 환자 '박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담당의사인 김 박사는 '박준'이 심한 히스테리의 일종인 진술 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환자는 무엇인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박준'의 본명은 '박준일'로서 1-2년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소설가이다. '나'는 '박준'이 쓴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그리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중편 소설 등을 읽게 된다. 그 소설 중에 '박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짓불의 실체가 드러난다.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浦口)가 고향인 '박준'은 6?25가 일어났던 해 가을, 밤중에 밀어닥쳐 전짓불을 들이대고 좌인이냐, 우익이냐를 묻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게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김 박사에게 찾아가서 '박준'의 병인(病因)을 이야기하지만, 김 박사는 자신의 권위 의식 때문에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김 박사는 '박준'의 병실 불을 끄고전짓불을 들이대는 치료 방법을 택하고 만다. 그날 밤 '박준'은 병실을 도망쳐 나가 버린다.

  '나'는 '박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를 회의하면서 길을 걷다가 김 박사나 내가 박준의 병세를 더 악화시켰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핵심정리

 - 갈래 : 중편소설

 - 배경 : 글쓰기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구성 : 액자 구성

 - 주제 : 의사(意思)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한 인간의 정신적 상처.

 - 출전 : <문학과 지성>, 1971년



구성

 - 발단 : 골목길에서 박준을 만남.

 - 전개 : 박준에 대한 관심. 정신 병원을 찾아감.

 - 위기 : 박준의 치료 방법에 대하여 '나'와 담당의사 김 박사의 의견 대립.

 - 절정 : 전짓불의 공포로 박준이 미쳐서 병원 탈출.

 - 결말 : 박준의 행방 불명.



등장인물

 - 나 : 잡지사 편집장. 우연한 기회에 소설가 박준을 만나 그의 정신병의 근원에 호기심을 갖는다. 드디어 작가인 그(박준)가 '왜 글을 못 쓰는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다.

 - 박준 : 6?25 때 겪은 '전짓불의 공포'와 현재의 불안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 병원에 자청해서 들어간 소설가. 그러나 거기서도 담당 의사의 고정된 질문과 전짓불의 충격으로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는 정말 미쳐서 병원을 뛰쳐나간다.



이해와 감상

  1971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중편 소설. 주인공 '박준'은 소설가인데, 그는 억압된 상황과 작가의 사명 의식 사이에서 절망하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병리 현상을 겪는다. 서술자 '나'의 추적 결과, 한국 전쟁 당시의 '전짓불의 충격'이 박준의 공포증의 원인임이 밝혀진다. 결국, 진실이 거부되고 거짓된 언어가 판치는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벽(壁)을 본 순간 무엇을 느끼는가? '답답함'과 '격리'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 벽이 실체의 벽이 아닌 무형(無形)의 '소문의 벽'일 때 더욱더 두려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유형(有形)의 벽은 쉽게 부숴 버릴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편견과 억압으로 가득찬 '소문의 벽'이 숨통을 죄어 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 '박준'이 경험한 전짓불과 그의 세 편의 소설을 통해서, 진실의 숨통을 조이는, 보이지 않는 벽(壁)의 공포를 고발하고 있다.

  잡지 편집 행위에 대한 회의(懷疑)에 빠진 작중 화자인 '나'는 자기의 문제에 대한 원인 규명에 힘쓴다. 그때 소설가 '박준'의 고통의 해명에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박준'의 세 편의 소설은 각기 주제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소설은 가사(假死) 상태의 주인공 이야기인데, 이는 자기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주인공의 허탈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소설은 벌거벗은 사장님의 이야기로서, 어떤 진실을 알고도 주위의 간섭이나 이목 때문에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 번째 소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者), 즉 심문관이 등장한다. 그 자의 정체는 시대적 통념, 정치적 억압, 문학의 허위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가 심문관인 동시에 '소문의 벽'인 것이다.

  이청준은 '박준'이란 인물과 그의 소설을 통하여 글쓰는 작업에 대한 작가 자신의 회의(懷疑)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박준'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인 김 박사를 통하여 고통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존재들을 비판한다.



이청준(李淸俊, 1939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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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하였다. 1960년 광주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 단편 '퇴원'이 제 7회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는 <사상계>  <여원> 등 출판계에 종사하다가 그만둔 후 전업 소설가로 활발히 활동하여 왔으며, 대표적인 창작집으로는 <별을 보여드립니다>(1971) <소문의 벽>(1972) <조율사>(1973) <가면의 꿈>(1975) <자서전들 쓰십시다>(1977) <예언자>(1977) <남도 사람>(1978) <살아있는 늪>(1980)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1981)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따뜻한 강>(1986)이 있다. 또한 장편으로는 <당신들의 천국>(1976) <춤추는 사제>(1979) <자유의 문>(1989) <인간인>(1991)이 있다. 그는 뚜렷한 개성과 작가 정신을 인정받은 소설가로서, 동인문학상, 문화예술신인상, 이상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중앙문예대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 여름 폐암 판정을 받고 2008년 6월 중순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7월 31일 새벽 4시쯤에 결국 향년 68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삶과 현실은 대단히 다양하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첫째 <줄> <매잡이> <과녘> <줄광대> 등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장인에 속하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 둘째 <빈 방> <황홀한 실종> <퇴원>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어떤 정신적인 상처가 개인의 정신적-생리적 이상현상을 일으킨 삶, 셋째 <서편제> <남도 사람들> <선학동 나그네> 등 남도의 '소리'를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세계, 넷째 <언어사회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떠도는 말들>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 <다시 태어나는 말>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말'의 상실 및 추구의 세계, 다섯 번째가 <개백정> <뺑소니 사고> 등에서 볼 수 있는 폭력적인 현실의 체험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네이버 백과 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743434)
 

소문의 벽 []
요약
이청준()의 중편소설.
저자 이청준
장르 중편소설
발표 1971년 《문학과 지성》 여름호
본문

정신분열증이 되어가는 한 작가의 잠재의식을 추적함으로써 진실과 억압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잡지사 편집장인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누구에게인가 쫓기고 있다고 도와달라는 한 사내를 만난다. 엉겁결에 그를 하숙방으로 데려온 나는 불을 끄고 잠을 청하였으나 어느새 사내에 의해 다시 불이 켜져 있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와 불을 켰다 끄는 두세 번의 실랑이 끝에 잠이 들었던 나는 아침에 깨어나서 사내가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정신병원을 찾아갔다가 그 사내가 병원에서 도망친 환자 박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담당의사인 김박사는 박준이 심한 히스테리의 일종인 진술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환자는 무엇으로부터인가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진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박준의 본명은 박준일로서 1~2년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소설가이다. 이튿날 밤 다시 하숙집을 찾아온 박준을 정신병원에 데려다 주고 난 나는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러다가 박준이 쓴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그리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중편소설 등을 읽게 된다. 그 소설 중에 박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짓불'의 실체가 나타난다.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가 고향인 박준은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가을, 밤중에 밀어닥쳐 전짓불을 들이대고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묻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 대해서 그토록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깨달은 나는 김박사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환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믿는 김박사는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김박사는 박준의 병실불을 끄고 전짓불을 들이대는 수단을 택하고 만다. 그날 밤 박준은 병실을 도망쳐 나가버린다. 나는 박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 회의하면서 길을 걷다가 김박사나 내가 박준의 병세 악화에 박차를 가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이 작품은 일견 전쟁의 상흔으로 인하여 부서져가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나타내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짓불 앞에서 답변을 강요당하는 주인공의 의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의 인식이며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소명의식이다.

이 작품은 진실된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예술가와 왜곡된 현실의 억압상황에서 나타나는 갈등문제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묻고 있으며 독자 스스로 그 대답을 성찰하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의 가치가 마멸되지 않는 한 이 작품의 진지성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1972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작품 감상 

  아무
리 깊은 취중의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박준을 대뜸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이게 된 데는 어딘지 꼭 그럴 말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날 밤 박준이 처음 나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나에게는 얼굴도 성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내에 불과했고, 또 그런 박준은 아무리 그가 기괴한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려 했다 해도 다방거리나 신문 같은 데서,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런 돌발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데 그런 내가 그런 박준을 하숙방까지 끌어들여 함께 밤을 지낸 것이다.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를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먹게 되었는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동기가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다.


십여 일 전쯤 일이었다. 아마 밤 11시 50분은 넉넉히 되었을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도 나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콧구멍까지 잔뜩 술기운을 채워 가지고 휘청휘청 하숙집 골목을 더듬어 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직업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취해 버리지 않고는 견뎌 배길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지사 일 말이다. 잡지  일이란 사실 어떻게 보면 무척 쉬운 일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만 저만 어렵게 여겨지지 않을 때도 많은 것이다.. 맘먹기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 잡지 만드는 일이다.. 이 일은 언제나 자기 창의력과 독자에 대한 책임만을 요구한다. 창의력을 포기해 버리면 독자에 대해 책임도 면제되고 만다. 자기 창의력이나 독자에 대한 책임을 포기해 버린 채 잡지를 만들어 가자면 그것처럼 쉬운 이이 없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면 또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잡지에서의 창의력과 책임은 언제까지나 완성되어질 수가 없고 또 결코 완성되어져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나는 편집장이라는 나의 부서가 마음에 걸려 있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잡지 만드는 일을 그리 만만스럽게 여기고 있지는 못한 편이었다. 편집장으로서의 나의 작업은 한 달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그 달의 잡지 편집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수정하고,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편집 안에 따라 거둬들여진 원고들을 효과적으로 종합하면서, 한편으로는 또 나의 재질과 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실망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잡지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만큼은 어렵게, 그리고 그만큼은 책임이 따르는 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선 그 긴장이 언제나 만족스런 작업결과로 해소되어지지도 못했다. 우리들의 편집 안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고, 그 만족스럽지 못한 편집 의도나마 필자에게 제대로 납득되어진 글을 얻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원고가 잘 거둬들여지질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요새 와선 통 필자들이 글을 잘 쓰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가까스로 글을 얻어내고 보면 이건 또 이쪽 편집 의도하고는 아무짝에도 상관이 없는 남의 소리이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원고마저도 발을 개고 앉아서는 죽어라 힘이 드는 판이다. 잡지의 책임이고 뭐고를 따질 겨를조차 없는 판국이다 어느새 마감 날이 불쑥 코앞까지 다가들어 버리곤 한다. 나의 일은 그 무의미한 마감날짜와의 무의미한 싸움으로 변해버린 지가 오래다. 그것도 한 두 달로 간단히 끝나 주는 싸움이 아니다. 일년 열두 달 같은 싸움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애초의 긴장은 짜증과 체념 속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그렇게 되면 나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작자들이 무슨 이유로 그처럼 한결같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술을 마시고 나면 나는 또 더욱 깊은 허탈감에 젖어들면서 끝내는 그 무의미한 싸움에 그만 끝장을 내어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솟아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이 몇 달 동안 나의 퇴근길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 날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으레 몇 군데 술집부터 헤매기 시작했고, 그리고 술이 웬만큼 취하고 나서부터는 나의 그 무의미한 싸움과 퇴직 문제에 대해 답답한 상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마침내 12시가 거의 가까워진 다음에는 콧구멍에서 잘 익은 감 냄새를 물씬거리며 밤늦게 하숙집 골목을 휘청휘청 더듬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데 그때 불쑥 내 앞에 박준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니 나로서는 물론 그때 그가 박준인지 누군 지도 알 수가 없었고, 혹은 그가 선뜻 박준이라고 자기 이름을 대어 주었다 해도 그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정체를 이해할 숙는 없었을 것이다. 사내 하나가 후다닥 골목 어귀로 뛰어들더니 두말없이 나의 등덜미를 부여잡고는 애걸을 하기 시작했다.

"형씨, 미안하지만 절 좀 도와 주시오."

사내의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어둠 속에서 찬찬히 사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는 안타까운 듯 한층 더 다급한 어조로 매달려 왔다.

"제발 형씨,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날 좀 도와 달란 말이오. 난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이오."

어서 자기를 어떻게 해달라는 듯 나의 팔을 끌어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정신 없이 숨을 헐떡거리며 허둥대는 꼴로 보아 사내가 지금 누구에겐가 다급하게 쫓기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물론 내가 사내를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엄두가 날 수 없었다. 밤이 너무 늦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슨 이로 쫓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직은 그를 쫓고 있다는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날더러 형씨를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어째서 이런 밤중에 쫓기고 있느냔 말요?"

나는 술기가 조금씩 걷혀 오는 것을 의식하며 사내로부터 한 발짝 몸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사내는 나에게 경계할 틈마저 주지 않고 계속 매달려 왔다.

"아,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우선어디든 저를 좀 숨겨 달란 말입니다. 어서… 아마 형씨의 집은 이 근처 어디가 아니겠소……."

박준은 그러니까 그렇게 하여 그 날 밤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를 나의 하숙방까지 들여놓게 된 경위도 대략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때 어찌 된 일인지 문득 사내를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가엾게 떨고 있는 사내를 말없이 나의 하숙방까지 안내하고 말았었다..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술김이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잘 납득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까지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때 내가, 사내의 정체를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사라지면서 그를 나의 하숙방까지 안내하게 되어 버린 데는 꼭 그럴 만한 나대로의 이유나 느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아무래도 잘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어떻게 해서 처음 박준을 나의 하숙방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들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그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아무리 취중에 그런 일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그 일로 해서 무슨 피해를 입었거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의 그런 행동을 후회하고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 내쪽으로만 말한다면 그 날의 일은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정신의 궤적과 비밀을 내 나름대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무의미한 혼란만 끝없이 계속되어 오던 나의 잡지 일에 대해서도 모종의 해답을 암시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는 그렇게 박준을 만나게된 나의 이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박준 그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선 그 날 밤 이야기를 마저 끝내는 것이 좋겠다. 그 날 밤 사내는 방을 따라 들어오고부터 거동이 더욱 수상쩍어지고있었다. 사내는 바로 머리가 돌아 버린 광인이었다. 그가 정말 광인인지 아닌지 그때로선 아직 확실한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사내는 바로 그 자신이 그렇게 자기를 머리가 돈 사람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물론 그러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 여기가 내 방인가 봅니다. 이제 기왕 영기까지 왔으니 사정이나 좀 들어 봅시다."

방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대뜸 옷을 홀홀 벗어 젖히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이상스럽게 묵묵부답인 채 멀거니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형씬 무슨 일로 그렇게 밤거리를 쫓기고 있었느냔 말입니다 .형씨를 쫓아온 건 어떤 사람들이냐구요."

같은 말을 다그쳐 물어댔다 .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집스런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의 정체나 사건 내력은 끝내 털어놓지 않을 작정이라도 선 듯 나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있었다. 얼핏 옷을 벗을 생각도 않고, 긴장한 눈초리로 나의 일거일동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응답이 없을 뿐 아니라 방으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오히려 사내 쪽에서 내가 수상쩍게 여겨지고 있는 눈치였다 터무니없이 나를 경계하고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아직 어떤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건, 그 공포감 때문에 나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사내는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쫓기고있지 않았어요. 아깐 잠깐 거짓말을 했었지요."

그리고 나서 사내는 내가 어이없어하거나 사연을 캐물을 틈도 없이 선언하듯 단호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난 미친 사람이오."

"뭐라고요? 형씨가 미친 사람이라구요."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겨우 그렇게 한마디를 물었다. 도대체 그의 말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이제 정말 자신의 실성기를 확인이라도 시켜 주고 싶은 듯 입가에다 음산스런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내게 그런 거짓말을 했지요? 누구에겐가 형씨가 쫓기고 있는 거라고 말이오?"

"그러니까 난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소. 하지만 아까 내가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것은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땐 정말 누가 나를 쫓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거든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난 그걸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정말이었다. 정말로 나는 사내의 거동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그를 머리가 돌아 버린 친구로 곧이들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어떤 피곤기 같은 것을 느끼면서 한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사내도 이젠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고 있었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날 밤 사내의 정체가 수상쩍은 것은 그가 자신을 스스로 머리가 돈 사람이라고 우겨대면서 이리저리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리만 둘러대고 있는 것 한가지 사실만도 아니었다. 실상은 이 이야기를 먼저 말해야 옳았을 것이지만, 정체가 수상쩍은 점으로 말하면 그의 행동거지보다도 모습이 더욱 심했다. 다름아니라 그것은 바로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내가 사내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불을 밝히고 난 다음이었다. 한데 그때 나는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사내의 얼굴을 보고는 뭔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어둠 속에서보다는 의외로 키가 컸고, 그 큰 키 때문에 조금 말라보인 듯한 몸집에는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이상스런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양복 소매가 약간 짧은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바지 통이 터무니없이 넓어 보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와이셔츠 넥타이도 없이 맨저고리만 훌렁 걸치고 있어서, 그 꼴이 여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 사내를 보고 놀랐다는 것은 그처럼 우스꽝스런 사내의 차림새 때문이 아니었다. 옷차림 따위는 사내 자신의 말대로 미치광이의 그것이라고 해두면 그만이었다. 놀란 것은 사내의 얼굴 모습 때문이었다. 사내의 얼굴이 첫눈에 어디선가 꼭 한 번 본 일이 있는 것처럼 익숙했던 것이다. 사내의 얼굴은 한마디로 좀 우악스러워 보이는 입 모양과, 세상이 온통 밝은 햇빛 속에 빛나더라도 그 한 곳만은 언제까지나 음울한 그늘이 마를 것 같지 않은 깊은 두 눈으로 간단히 특징지워질 수 있는 그런 인상이었다. 한데 나는 그런 입과 눈을 가진 얼굴을 어디선가 전에 한번 꼭 만나 본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어떤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들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있는 듯한 사내의 두 눈은 그 큰 눈동자 때문에 더욱더 깊게 강조되어 나의 뇌리를 안타깝게 간질이고 드는 것이었다.

―어디서 만난 얼굴일까. 누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런 기억은 첫 번에 대뜸 실마리가 잡히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허사가 되게 마련이다. 아니 성급하게 굴면 굴수록 그런 일은 더욱더 안타깝게 깊은 망각의 수렁 속으로 숨어 들어갈 뿐이다.

사내의 얼굴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나는 끝내 그 얼굴의 기억을 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사코 정직한 말을 회피해 버리고 있는 사내에게 직접 그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서로 이름이라도 나누어 보면 간단히 실마리가 잡힐 듯 싶었지만 사내의 태도로는 그것도 선뜻 알아내질 것 같지 않았다. 술기가 가시고만 탓인지 이젠 나 자신도 그런 저런 일이 다 피곤하고 귀찮기만 했다. 모든 일을 아침으로 미뤄 놓고 우선 잠부터 좀 자두고 싶었다. 나는 한동안 사내를 건너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자리를 펴고 나서도 금세 그 자리로 기어 들어가 버릴 수가 없었다. 역시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사내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긴장을 풀어 버리기는커녕 사내는 아직 저고리도 벗지 않은 채였다. 잠자리를 펴고 있는 동안도 그는 아직도 창 밖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지나 않은지, 또는 천장이나 옷장 구석 같은 데서 누가 자기를 숨어 엿보고 있지나 않은지 조심조심 기색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내도 사람이었다. 끝끝내 그러고 서서 밤을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사내는 나의 주의가 완전히 그에게서 멀어져 버린 것을 알고 나자, 그리고 바깥으로부터도 아무 수상쩍은 기척이 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제야 겨우 마음이 좀 놓이기 시작한 듯 슬금슬금 방구석으로 무릎을 구부려 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뿐이었다. 흘러내리듯 그렇게 몸을 주저앉히고 나서도 옷을 벗어붙일 기미는 없었다. 궁상맞게 몸을 방구석에 쪼그리고는 다시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정체에 대해 내가 새로 무슨 추궁을 가해 오지나 않을지 싶은 듯 근심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정말로 그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취기가 깨어 오는 데서 생긴 무력한 탈수감을 그 이상은 도저히 지탱해 낼 수가 없었다. 사내의 기분을 좀 편안하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설마 네 놈이 정말 미쳐 있는 건 아니겠지. 미쳐 있다면 또 그러고 앉아서 밤을 지샐 테냐. 맘속을 편하게 먹어 버렸다.

"아무렇게나…… 형씨 편할 대로 자리를 잡아 보시구려."

이불자락 한끝을 밀어 젖혀 주고는 그만 혼자 잠을 청해 버리고 말았다.

한데 이날 밤 일은 그렇게 내가 먼저 잠이 들어 버리고 난 다음이 또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나는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사내가 공연히 가엾어졌고, 그래서 나중에는 그의 곁에서 무모할 정도로 쉽게 잠이 들어 버리기까지 했지만, 역시 깊은 내심에서까지 그를 아주 안심해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이 들고나서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다시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시간이 오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내가 잠이 드는 것을 보고 곧 몸을 눕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사내는 아직도 옷을 벗지 않은 채 이불자락 끝에서 옹색스런 새우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상스런 것을 진깃불이었다. 그는 잠이 들면서도 전깃불을 그냥 켜놔 두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 전깃불에 대해 별스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내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려니, 무심스럽게 넘겨 버렸다. 한데 어느 때쯤 해선가 내가 다시 눈을 떠보니 어찌된 일인지 아까 분명히 내 손으로 꺼놓고 잔 형광등이 다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내가 잠을 깨게 된 것도 바로 그 밝은 불빛 때문이었다. 이상스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사내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역시 아까처럼 옹색스런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형광등을 다시 밝혀 놓은 것은 그 사내밖에 다른 곡절을 생각할 수 없었다. 도대체 방안에서 나와 그 사내말고는 누가 꺼져 있는 전깃불을 다시 켜놓을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날 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전등불을 껐다  켰다 하는 숨바꼭질은 그 한번만으로 끝난 일도 아니었다. 이날 밤 나는 분명히 꺼놓은 전등불이 다시 밝혀져 있곤 하는 요술을 그 후로도 두 차례나 더 당해 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그 요술에 걸려 눈을 떴을 때는 뜻밖에도 그 밝은 불빛만 방안에 가득할 뿐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체하고 있던 사내의 새우잠마저 이미 나의 곁에선 자취를 감추고 없었던 것이다. 사내는 그렇게 새벽같이 나의 방을 도망쳐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사내가 정말 머리를 상해 버린 미치광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그 날 밤으로 해서는 사내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던 셈이 된다. 정체를 알아내기는커녕 궁금증만 잔뜩 더 늘어 있었다. 사내의 이름하며 수상쩍은 행동들의 내력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아침 병원을 찾아보고 나서였다.

그 날 아침 나는 간밤에 일어난 일을 곰곰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기분이 상해 오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도 그것은 모두가 술김에 저질러진 일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취중의 일이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두 술기운 탓으로 간단히 잊어 비릴 수는 없었다. 어이가 없다가도 사내의 거동들이 하나하나 다시 떠오르곤 했다. 사내가 진짜 미치광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점점 더 짚어져 가고 있었다.

―사내는 정말로 미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이 멀쩡하다면 무슨 심술로 사람을 그렇게 어리둥절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정신이 멀쩡한 친구라면 도대체 그런 식으로 밤길을 쫓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할 리도 없었고, 초면에 하숙방까지 따라 들어와 횡설수설 수상쩍은 소리들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그 괴이한 차림새하며, 까닭 없이 자꾸 불안스러워하고만 있던 표정, 또 밤새도록 꺼놓은 전깃불을 몰래 다시 켜놓곤 하던 짓 모두가 광인의 그것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정말 미친 사람이라면 나는 어디서 그런 얼굴을 만났기에 그처럼 한눈에 익숙할 수가 있었을까.

광기에 대한 심증이 점점 더 깊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한데 마음 속에서 그렇게 한참 사내의 광기를 굳혀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하숙집에서 얼마 되지 않은 산중턱엔 언제부턴가 이름 없는 정신병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나의 대뇌작용은 그제야 간신히 그것을 기억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자 나는 잡지사 대신 곧바로 그 병원부터 먼저 찾아 올라갔다. 한데 병원 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 접수부에서부터 벌써 환자 한 사람이 간밤에 병원을 도망쳐 나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맞아요. 어젯밤에 우리 병원에서 병실을 탈출해 나간 환자가 한 사람 있었어요. 자정쯤 해서였는데요, 한데 선생님께선 그 환자를 만나셨던가요."

접수부 간호원은 내가 미처 물음을 끝내기도 전에 조급한 목소리로 사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자정이 조금 넘어 경비원이 뒤뜰을 돌아가다 보니, 3층 병실의 한 창문 쇠창살로부터 침대 시트를 총총 꼬아 만든 밧줄이 허옇게 뜰 아래로 내려뜨려져 있었고, 바로 그 밧줄이 내려진 3층 병실에는 어느 틈엔가 환자 한 사람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없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환자가 어떻게 병원 진찰실까지 스며 들어와서 당직 의사의 평상복을 훔쳐내다가는 환자복 대신 그 옷을 바꿔 입고 간 사실이 드러났고, 그 바람에 병원에선 더욱 큰 소동이 일어났었노라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간호원이 그때 그렇게 도망쳐 나간 환자의 이름을 일러 주었을 때였다.

박준일(朴濬一)―간호원의 접수부에는 그 환자의 이름이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한데 그 박준일이 바로 박준이었다. 아니 박준일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 간밤의 사내를 박준으로 단정해 버린 것은 나의 직감에서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시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다.

박준―그런 이름의 젊은 소설가 한 사람이 있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이 한두 해 전만 해도 한창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던 그 젊은 소설가 말이다. 한데 이 소설가의 본명이 박준일인 것이다. 박준일이 그의 진짜 이름이고 세상에 알려진 박준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 끝에서 일(一) 자 하나를 떼어버린, 이를테면 그의 필명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가 쓴 글 가운데서 우연히 이런 고백을 읽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외자 이름에 대해서’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수필 형식의 글이었는데, 그 글 가운데서 박준은 대충 이런 식으로 자기의 이름을 매도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원래 박준일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나의 그 이름 석 자(사실 이름만 해서는 두 자뿐이지만)가 무척도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나의 이름 맨 끝에 매달려 있는 ‘일(一)’자가 그렇게 느껴졌다. 도대체 나라는 놈의 푼수로는 박가 성 밑에 준자 하나만으로도 이름이 충분하고 남을 텐데 무엇 때문에 거기다 또 ‘일’자를 하나 더 붙여 달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성 한 자 이름 두 자로 꼭 짝을 맞춰야 하는 작명 버릇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일자 하나가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웠다. 어떤 때는 좀 주제넘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결국 나는 그 일자 하나를 떼어버리고 준자 하나만으로 이름을 삼기로 작정했다. 박준…… 글쎄 그 일자 하나를 떼어버리고 나니 얼마나 간편하고 개운스러운 이름이 되었는가 말이다…….


결국 박준이라는 그의 이름은 원래 이름인 박준일에서 끄트머리 일자를 떼어 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한데 그때 간호원의 입으로부터 박준일이라는 사내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첫마디에 단박 그 박준의 글이 떠올라 왔던 것이다. 하기야 내가 그 간호원으로부터 사내의 이름이 박준일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 그리고 우연스럽게 읽어 둔 글 속에서 박준이라는 젊은 소설가의 본명이 박준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금세 단정을 하고 나선 것은 지나치게 경솔했다고 생각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로 말하면 그런 것까지 돌이켜 따져 볼 여지란 생각조차 해볼 수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간호원의 입으로부터 박준일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나에게선 간밤부터 계속되어 오던 궁금증, 어디선가 사내를 본 일이 있는 듯싶던 그 안타까운 얼굴 모습이 순식간에 박준일이라는 이름과 결합을 해버린 것이다. 전날 밤 사내의 얼굴은 가끔 내가 신문 문화면 같은 데서 자신으로 보았던 박준의 얼굴, 어딘지 좀 모질어 보이는 입모습과 우울하도록 깊은 눈을 한 그 박준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접수부 앞에 그러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담당의사를 좀 만나 보고 싶었다. 의사를 만나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간밤의 궁금증은 이제 그것으로 거의 다 풀려 버린 셈이었지만, 그 사내가 박준으로 밝혀진 이상 다시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뭐 내가 전부터 박준과 무슨 특별한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미 짐작을 하고 있을 일이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 날 밤 일이 있기 전에는 박준이라는 친구를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가끔 그의 글이며 사진 같은 것을 볼 수는 있었지만, 직접 그를 대면하게 된 것은 그 날 밤이 처음 일이었다. 그것도 이튿날에 가서야 겨우 그의 이름을 듣고 사진의 얼굴도 기억해 냈을 정도의 괴상한 초대면이었다. 친분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인 친분 관계를 떠나서도 박준과 나는 이만저만 긴밀한 관계에 놓이지 않을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나는 한 잡지의 편집자였고, 박준은 언제고 그 잡지에다 글을 쓰게 되거나, 글을 써주어야 할 필자의 입장이었다. 그와 나는 애매한 듯하면서도 그처럼 서로 회피할 수 없는 상관 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박준은 언젠가 우리 잡지사에 글을 한 편 보내 온 일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문학 면을 맡고 있는 안형이 한사코 발표를 보류하고 있긴 하지만(사실 나는 그래서 여태까지 박준과의 대면을 나도 모르게 은근히 피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박준은 그런 점에서도 더욱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의 일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연유에선지 박준은 이 일이 년 동안 거의 한 편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던 박준이 갑자기 그런 식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을 알고 나니 궁금증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를 만나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이튿날도 나는 일찌감치부터 사무실을 나와 있었지만 박준의 일 때문에 도대체 자리를 지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번 달 잡지 일은 이제 나의 머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리고 없었다. 사무실을 나온 것은 순전히 기계적인 습관에서였다. 잡지 일은 안형이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나는 도무지 박준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박준의 일이 결말나지 않고는 아무것도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날은 전날 밤 일 때문에 더욱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전날 밤 나는 박준을 만나고 나서 다시 김박사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인터뷰를 그만두지 않으려면 차라리 박준을 병원에서 내보내 주는 것이 낫겠다고 핏대를 세우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김박사는 역시 신념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도 지나칠 만큼 투철했다. 자기로서는 절대로 인터뷰를 중단할 수 없으며, 더구나 그런 식으로 환자를 병원에서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은 내가  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식으로 항복을 하고 나서도 마음이 놓일 수는 없었다. 필시 김박사 쪽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의사로서의 김박사의 권위 앞에 그 잘못을 드러내 보여 줄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조마조마한 느낌이 가셔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조마조마한 기분이 이튿날까지도 계속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사무실을 서성대고만 있었다. 박준에 대해 아직도 뭔가 미진한 것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박준을 위해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통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박준의 생각을 포기해 버리려고 하진 않았다. 무엇인가 그를 위해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왔다. 화장실 휴지 조각에서 잠깐 읽다 만 인터뷰 기사를 마저 읽어보고 싶었다. 전짓불의 기억에 대한 박준의 보다 직접적인 진술을 보고 싶었다. 앞 뒤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전짓불이 실제로는 박준을 어느 만큼 심하게 간섭하고 있는가를 좀더 분명히 알고 싶었다. 앞뒤를 읽어보면 분명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사환아이에게 메모 쪽지를 들려 신문사로 보냈다. 이내 신문사 친구가 보관용 스크랩을 보내 왔다. 나는 곧 기사를 훑기 시작했다. 한데 내가 사환아이를 신문사로 보낸 것은 어쨌든 다행이었다. 기사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박준의 인터뷰 기사는 벌써 2년쯤 전에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진술되고 있는 박준의 말도 2년 전의 그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데 그 2년 전에 벌써 박준은 이후로 씌어질 작품들과 자신의 운명에 대해 놀랄 만한 예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물론 예언을 위한 예언은 아니었다. 양심적인 작가라면 당연히 문제가 되고 있을 자신의 작가 현실에 관해 심경을 털어놓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마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예언이 되어진 것이다. 2년이 지난 오늘날의 박준을 상상해 볼 때 그의 말은 너무도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었고, 너무도 적중한 현실로써 그 암시가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소재는 주로 어떤 데서 구하고 있는가, 즐겨 다루는 테마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는가, 인터뷰는 처음 그런 식으로 지극히 평범한 얘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잠시 후에 소설에 있어서의 한 작가의 경험 세계와 상상력의 관계 같은, 좀 이론적인 데로 옮겨가더니 마침내는 박준의 문학 입장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문학 행위는 크게 보아, 보다 넓은 인간의 영토를 획득하고, 이미 획득한 영토에 대해서는 이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되풀이 확인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 행위를 굳이 어떤 식으로 구분하려 든다면 거기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작가에 있어서 그 문학적인 입장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전자의 방법에 자기의 문학을 봉사시킬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후자 쪽에서 그것을 완성할 수도 있다. 한 작가가 자기의 문학을 어느 쪽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든 그것은 완전히 그 작가의 자유이다.

―그것이 작가의 자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시대적인 요구나 시민으로서의 양심도 초월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작가를 막론하고 그가 만약 정직한 작가라면 자기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시대를 극복해 나가려는 방법은 작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주관적으로 말한다면 한 시대가 모든 작가들에게 어떤 특정한 작업 방법을 요구해 올 경우를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시대의 압력이란 모든 작가들에겐 상대적인 것이며, 일률적으로 그들을 강제할 기준을 지니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작가는 그가 만약 자기 시대의 요구를 비겁하게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극복해 나갈 방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은 그 방법일 뿐이다.

―자신의 얘기를 해달라. 당신이 선택하고 있는 방법 말이다.

―그것은 위험한 질문이다.

―왜 위험하다고 하는가.

―그런 질문들은 대개 한 작가에겐 쓸데없는 선입견을 강요하게 된다. 그런 질문들은 작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눈으로 정직하게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할 뿐이다.

―결국 말할 자신이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핀잔을 먹어도 할 수 없다. 작가란 애초에 작품으로 말할 권리를 얻은 사람이다. 대답이 자꾸 부실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런 식으로 간단히 한 작가의 말을 빼앗아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그 작가에게 작품을 쓰지 않아도 좋다는 얘기가 된다. 진짜 작가와의 이야기는 소설로만 가능하다. 작가에겐 소설로 말을 하게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문학은 한낱 소문 속의 소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적어도 소문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소문이 될 수는 없다.


문답이 상당히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반대로 이야기는 점점 암시성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한데 진짜로 나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대목은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의 소설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은가.


기자가 다시 묻고 있었다. 그러자 박준은 여기서 엉뚱한 데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데 그것이 바로 2년 후에 그의 소설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그리고 하루 전에 내가 화장실 신문 조각에서 잠깐 읽은 일이 있는, 그 전짓불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애써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체를 알게 되면 경우에 따라 다른 내용의 진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전짓불에 대한 기억과 ‘위험스런 질문’에 대한 박준의 설명이 끝나고 나자 기자가 힐난조로 다시 묻고 있었다. 박준의 대답은 여기서부터 진짜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작가는 그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들과 상관없이 정직한 자기 진술만 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작가의 양심이라는 것 아닌가.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그러나 나에게서는 이미 그 양심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이 지켜질 수 없게 되고 있다는 것뿐이다. 전짓불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짓불이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니 나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그런 것은 알지도 못한 새에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편이 되어 있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가혹한 복수를 당하곤 한다.

―정직한 진술이 언제나 복수를 당한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않다. 언제나 복수가 뒤따른다. 그 전짓불은 도대체 처음부터 이쪽을 복수하고 간섭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전짓불의 편이 되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작가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침묵을 지킬 수는 더욱 없다. 작가는 누가 뭐래도 진술을 끊임없이 계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족속이니까. 괴로운 일이지만 작가는 결국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 죽든 살든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럴 수마저 없게 된다면 그는 아마 영영 해소될 수 없는 내부의 진술욕과, 그것을 무참히 좌절시켜 버리고 있는 외부의 압력 사이에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다. 당신은 아까부터 자꾸 전짓불의 공포라는 말을 써왔는데, 그리고 당신은 지금도 그 전짓불의 간섭을 받고 있다고 말했는데, 당신의 소설 작업과 관련하여 지금 당신은 어떤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없는가.

―말해 줄 수 있다. 그것은 소문 속에 있다.

―소문 속에라면, 실제로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실제로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 소문의 옷을 입고 있는 것뿐일 것이다. 그래야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복수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람들은 원래 그런 소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선 늘 두꺼운 소문의 벽을 쌓아 주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모든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박준이 마지막으로 전짓불의 이야기를 썼던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박준은 작가란 괴로운 일이지만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박준은 그만한 각오조차도 지켜 내질 못해 온 셈이었다. 그의 독자들이, 안형과 내가, 그의 소설을 내보내 주지 않은 교활한(또는 지나치게 용기가 없거나 용기가 없는 체하거나, 그 용기와 관련하여 편집이 심한) 편집자들이, 그보다도 그의 전짓불 뒤에서 끝끝내 정체를 드러내재 않은 채 복수만을 음모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 다니는 정체불명의 소문들이 그것을 지켜 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내면에 용틀임치는 진술욕과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전짓불 사이에서 심한 갈등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소문과 갈등을 빨아먹으며 전짓불은 그의 의식 속에서 엄청나게 크게 확대되어 갔다. 한데 바로 그 전짓불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속에서 은밀히 발아를 기다리고 있던 그 갈등과 불안의 씨앗이었다. 이제 그 씨앗이 발아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준의 마지막 소설 속에서 한 작가로 하여금 끝끝내 정직한 진술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방해 요인의 상징으로 훌륭하게 완성되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소설 속에서 한 작가가 얼마나 가혹하게 자기의 진술을 간섭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결국은 얼마나 무참한 파국을 겪게 되는가를 극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소설을 쓰게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한데 박준은 2년 전에 벌써 그 모든 것을 예감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로 그 박준의 예감대로 진행이 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박준이 그가 예언한 대로 정말 미친 사람으로 보일 만큼 전혀 자기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은 누구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을 혼자 몰래 숨겨 놓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게 확실해진 것은 그런 박준의 사정만도 아니었다. 박준의 사정이 확실해진 만큼 또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잡지 일이 탁탁해진 이유였다. 원고들이 잘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이나 걷혀 들어온 원고들이라야 모두 그렇고 그런 이유가 비로소 분명해져 있었다. 전짓불 때문이었다. 박준을 괴롭히고 있는 전짓불은 비단 박준 그 한 사람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술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자발적이든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든, 또는 일부러든 무의식 중에든 조금씩은 그 전짓불빛 비슷한 것을 눈앞에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구나 자기의 전짓불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한데 그 전짓불이란 이쪽에서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진술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욱더 두렵고 공포스럽게 빛을 쏘아 대게 마련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들이 잘 걷혀들 리 없었다. 쉽사리 거둬들일 수 있는 글이란 그 전짓불빛을 견디려 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런 글들이 신통할 리 없었다. 사정이 거기까지 확실해지고 나자 나는 혼자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오랫동안 주머니 속에 뒹굴려 대고만 있던 나의 사표에 생각이 미쳐 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나는 내가 무턱대고 사표부터 써놓고 다니게 된 나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미 나 자신의 진술의 길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퇴근 시간이 아직 한 시간쯤 남아 있었으나 나는 대강 책상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김박사가 나가기 전에 병원을 찾아가 볼 작정이었다. 김박사는 내가 병원을 들를 때마다 기다리듯 늘 자리에 남아 있곤 하던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김박사가 오늘도 또 밤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으란 법은 없었다. 일찍부터 서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꼭 김박사를 만나 결판을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그쯤 분명해진 이상 이젠 박준을 더 이상 김박사에게 맡겨 놓을 수가 없었다. 김박사의 신념은 더 이상 신용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박준을 병원에다 팽개쳐 두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하숙방으로라도 끌어 내 가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박준을 병원에서 끌어내기만 한다면 나는 나의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나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생각이 난 일이지만 그가 두 번째 날 다시 나를 찾아왔던 사실이, 그리고 지난밤에 또 그 비슷한 기미를 보여 왔었다는 사실이 내게 그런 확신을 갖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김박사의 신념이나 제도화된 병원 풍속과는 아무런 상관도 지어질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하고는 상극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데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해도 아직 떨어지기 전에 병원에 당도한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뜻밖의 사태에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박준의 일이 마지막판에 가서 또 엉터리없이 빗나가 버리고 있었다. 짐작대로 김박사는 아직 병원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한데 이날 따라 김박사는 나를 대하고 나자 이상스럽게 말을 쭈뼛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오실 듯해서 미리 사무실로 전화를 드릴까 했습니다."

지극히 거북살스런 어조로 말문을 열기 시작한 김박사의 고백인즉, 바로 어젯밤에 박준이 또 병원을 도망쳐 나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박사는 박준에 대해 처음으로 자신의 과실을 시인하는 듯한 말투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환자는 어젯밤 또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거든요. 아침에 깨어나 보니 병실이 비어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나와 나의 방법이 환자에게 지고 만 것이에요. 나의 방법이 환자에게 이런 낭패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허탈하게 지껄여 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박준으로부터는 비밀을 고백시킬 별다른 방법이 없더라고 했다. 그래서 김박사는 마침내 그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박준을 시험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비상수단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박준은 병원을 나가 버린 거라 했다.

"도대체 박사님이 그에게 사용한 마지막 방법이라는 건 어떤 것이었습니까?"

나는 벌써 박준이 병원을 나가 버린 것을 알고부터는 김박사 이상으로 기분이 허탈해져 있었다. 아무 말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무턱대고 김박사가 밉살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김박사에게 그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전부터도 이미 궁금스런 데가 많던 일이었다. 한데다가 김박사는 그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늘 자세한 말을 피해 버리는 눈치였다. 과연 김박사는 얼굴빛이 금세 달라지고 있었다. 뭔가 몹시 거북한 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한동안 나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끝끝내 침묵으로 대답을 강요하고 있는 나를 당할 수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알고 싶다면 이제 말씀을 드려도 상관없겠지요."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이던가요.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 정전 사고로 병원에 소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박준 씨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간호원에게 덮쳐들었다는 사건 말입니다. 난 그때 우연히 환자가 몹시 전짓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전짓불 앞에서는 그가 엄청난 공포감에 기가 질려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난 그때 환자로 하여금 지나친 공포감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하지만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그 전짓불로 환자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 전짓불로 환자를 적당히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서 비밀을 고백시킬 수가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한데 그런 생각은 노형께서 내게 들려 준 박준씨의 소설 이야기에서 더욱 확신을 얻게 되었지요. 소설의 주인공이 늘 어떤 전짓불 앞에 진술을 강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난 자신을 얻었어요. 물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마지막비상수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열심히 그를 설복시켜 보려고 애를 써왔지요. 한데 어젯밤에는 나로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군요. 마지막 방법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지요. 그의 방에 스위치를 내리게 한 다음 전짓불을 켜들고 들어가 그의 얼굴을 내리비췄지요. 한데……."

"한데 그가 또 발작을 일으키고 병원을 뛰쳐나가 버렸다는 건가요?"

나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기상천외의 이야기였다. 기상천외의 방법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김박사는 아직도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지요. 전짓불 때문에 발작을 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그 당장 환자가 병원을 뛰쳐나간 건 아닙니다. 박준 씨가 병원을 나간 것은 내가 그를 다시 진정시켜 잠을 재워 놓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이었지요."

나는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박사님은 그렇게 해서 그의 진술을 얻어내는 것이 아직도 그의 증세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가요?"

거칠게 대들기 시작했다. 이미 나에겐 김박사의 태도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그것으로는 보여 오지 않았다. 그는 적수를 굴복시키려는 한 고집 센 인간의 오기 덩어리에 불과했다. 신념에 넘친 듯해 보이면서도 사실은 지극히 비겁하고 치사한 오기 덩어리였다. 김박사도 그런 자신의 행동에는 뭔가 좀 석연치 않게 느껴진 대목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사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듯,

"하기야 난 이번 일에서만은 과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뒤늦게 의심이 간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아마 처음부터 정신분열의 증세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거든요. 단순한 노이로제만이 아니었으리란 말씀이에요. 아무래도 내가 그걸 재빨리 진단해 내질 못한 것 같아요."

엉뚱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김박사의 말인즉, 박준은 처음부터 미친 사람이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김박사가 단순한 정신신경증 환자로 다루어 온 게 잘못 같다는 것이었다. 나의 기분은 마침내 최소한의 자제력마저 버리고 있었다. 이젠 나에게도 박준이 단순한 노이로제 환자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정신상태가 결코 온전한 사람의 그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박준을 처음부터 김박사처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박준이 미친놈이라고 보신 것은 박사님의 잘못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박준이 처음 이 병원을 찾아왔을 때까지는 미쳐 있지 않았어요. 박사님께서도 늘 자신만만하게 장담하셨듯이 그는 처음부터 미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가 진짜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이 병원을 들어오고 난 다음부텁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지껄여 댔다. 내 멋대로 마구 단정적인 언사를 쓰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김박사를 매도해 주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박준을 정말로 미치게 한 것은 박사님 당신이란 말입니다. 박준이 이 병원을 찾아오기 전부터 그 전짓불에게 견딜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준은 그래서 자신의 피난처로 이 병원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병원 안에서 자신을 광인으로 심판받음으로써, 그 전짓불과 불안한 소문들과 모든 세상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었던것이란 말입니다. 박사님은 그가 누구보다 큰 진술의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그 욕망을 숨겨 버리려고 했던,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박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박사님은 그 살인적인 사명감과 자신력으로 어젯밤 끝내 박준을 미치게 하고 말았어요."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 같군요. 가령 내게 그런 과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인간이란 아무리 성실하려 해도 시행착오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김박사는 이제 그냥 듣고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이제 막다른 골목이라도 몰린 사람처럼 이상하게 태도가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 역시 김박사 앞에서는 이미 화를 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시행착오라고요? 그래서 박사님은 처음부터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박준을 그런 식으로 다뤄오셨다는 겁니까. 박사님께서 그렇게 간단히 말해 버린 그 시행착오라는 것 속에서 박준이라는 한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혀 버린 것인가를 상상이나 해보십니까."

"처음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그랬다는 건 물론 아니에요. 그러나 시행착오라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지요. 박준이라는 한 특정 환자에겐 불상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에게서 얻은 나의 경험은 이 병원을 위해서, 그리고 그와 비슷한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는 더없이 유익하게 활용될 수가 있을 테니까요."

더 이상 추궁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병원이 환자를 위해 있는 곳인가. 환자가 병원을 위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의사의 성실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의사의 성실성이라는 것은 그저 인간적인 성실성 그것만으로는 물론 충분해질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애초에 일종의 기술인의 그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한데도 김박사는 지금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하는가. 너무나 뻔뻔스런 일이다. 그런 김박사에게 박준을 다시 끌고 온 것이 무엇보다 잘못이었다. 박준을 미치게 한 것은 김박사뿐 아니라 그를 김박사에게 끌어다 맡긴 나의 책임도 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병원을 나왔을 때는 이제 겨우 땅거미가 조금씩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병원문을 나서고 보니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기분이 허허해 있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끝나 버리고 만 느낌이었다.

―박준이 어디로 갔을까. 병원을 나가고 나면, 그에게 또 어디 갈 곳이 있었을까.

얼마간 박준의 행방이 궁금스러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준이 갈 만한 곳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그게 어떤 곳일지 생각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막연한 궁금증이 머리를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어느 한 곳으로 생각이 모아지지도 않았다. 폐허처럼 가슴이 쓸쓸해져 오고 있었다. 집으로는 얼핏 발길이 돌려지질 않았다. 하숙방을 기어 들어가기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하숙집 골목은 언제나 어두컴컴한 밤길을 취기에 얼려 지나게 되어 있었다. 어느새 내게는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데 골목은 아직도 훨씬 더 어두워질 수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골목이 아직도 어두워지지 않은 것을 보자 나는 비로소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하숙집 골목과는 정반대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거리로 내려가서 주막을 더듬어 들어갔다. 주막을 찾아 들어가서는 정신없이 갈증을 끄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몸이 촉촉하게 젖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목구멍에다 술을 들어 부었다.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술잔을 비워 냈다. 내일 일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잡지사 같은 건 벌써 사표를 내던져 버리고 난 기분이었다. 박준의 일도 이젠 그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술이나 실컷 취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주막을 나왔다. 주막을 나와 봐도 이상스럽게 아직 완전히 마음 속이 편해져 있질 않았다. 아직도 취하지 않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박준 녀석, 제깟 놈이 병원을 나가면 어딜 간단 말인가.

박준의 생각이 머리에서 아주 떠나 버리질 않고 있었다.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술기운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녀석, 어쩌면 녀석은 다시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지.

제법 확신에 찬 기대를 품어 보기도 했다. 한데 박준에 대한 나의 그런 기대는 잠시 후 하숙집 골목을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진짜 어떤 착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밤은 벌써 11시를 훨씬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11시가 지난 밤 골목을 들어서자 나는 자꾸 어디선가 박준이 불쑥 나를 덮쳐 올 것만 같아진 것이다.

―형씨 나를 좀 도와 주시오. 나는 쫓기고 있는 사람이오. 제발 어서 나를 좀…….

어디선가 금세 박준의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조심 골목을 지나면서 한참씩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골목은 어둠뿐이었다. 골목을 다 지나고 나의 하숙집 대문 앞을 이르도록 끝끝내 박준은 나타나지 않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뒤쫓아오는 기척 소리 같은 것도 없었다. 행길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이따금 골목 이쪽까지 까만 정적을 깨뜨려 오곤 할 뿐이었다.          

『문학과 지성』 (1971)